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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카펜터라는 이름보다 볼리드라는 이름이 익숙해진 소년은 어느덧 건장히 큰 사내가 되었다. 그런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이 구는 것을 끔찍이 여겼다. 그것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다. 히어로일 때의 볼리드와 메피스토를 벗어난 이후의 볼리드는 그리 생각지 않겠으나, 적어도 게티아의 행동대장이자 히어로를 그만둔 빌런 볼리드는 그리 여겼다. 누군가 그런 자신을 알아챌까 한껏 가시를 세우고 짖어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볼리드라는 사내가 메피스토에서 보낸 약 12개월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빌런 헤리틱을 만나기 전까지는.

막 크리스마스가 지나 거리에서 반짝이는 전구가 정리되기 전, 그 언저리의 어느 날.

헤리틱의 공격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내는 이내 높은 열감과 연이은 부상에 그대로 볼품없이 고꾸라져 수 시간을 잠든 후에야 일어났다. 꼴사납게도, 그토록 가시를 세워 꽁꽁 감추어두었던 비밀을 무의식중에 흘리고 말았고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고 캐물어 오는 그를 밀어내고, 또 밀어내려다 결국은 실패했던 날 밤. 사내는 그날 밤 숨겨둔 약점을 들키고 만 대가로, 새하얀 천사를 닮은 악마의 작품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추락하는 유성은 멀리서 보는 누군가에겐 반짝이는 별이겠으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곧 있을 충돌로 인해 산산이 조각날 비극 외엔 남는 것이 없다. 사내는 자신이 곧 조각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아름다운 작품이자 동시에 추락하는 자신에게 남은 것은 비극일 테다. 언젠가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면, 더는 쓸모와 영감을 느끼지 못한 그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로라 여겼다. 어쩌면 그것은 깊은 죄책감을 껴안고 찬찬히 선악과의 늪 속에서 익사해가는 자신의 무의식이 간신히 수면 위로 떠올려 보낸 벌과 같았을 테지만, 그때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인 채 악마의 작품으로 살아가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 이것은 더는 악마의 작품이 아니게 된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사내는 여전히 작품이었으나, 더는 자신이 '악마'의 작품이라 여기지 않았다.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악마라 여겼던 자에게서 인간다움을 느꼈다. 그 또한 어딘가 결여된 사람이기에 이토록 비틀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악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저 자신처럼. 물론 그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어쩌면 억측이나 다름 없었을 터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상대를 향해 팔을 벌려 포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당신도 인간이었구나. 그렇다면 그동안 겪은 어떤 아픔이 당신에게 강제로 가면을 씌우고 악을 자처하도록 만든 것이란 말인가.

 

 

그를 안은 순간, 볼리드라는 사내는 제 내면에 언제고 폭발할 듯이 끓어오던 분노와 악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악만을 읽은 것이 아닌, 지극히 인간다운 면 또한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저 자신 또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이 지난 1년간 그러하였듯, 당신 또한 선과 악이란 선택지 사이에서 악을 고른 것은 결여된 자신을 견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음을. 저에게도 악한 면이 존재했던 것처럼 반대로 당신에게도 선과 애정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음을. 저에게 잠시 겨울이 찾아왔듯 당신의 내면에도 불모지가 아닌, 아직 녹지 않은 눈이자 겨울이 그저 조금 두터이 쌓여있을 뿐임을.

 

사내는 자신이 다시금 선에 눈을 뜨며 한 번 더 타인의 빛이자 지표가 되고 싶었다. 사내는 방황하며 지내는 동안 그것이 절실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깊은 동질감이 느껴지자 눈앞의 남자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연히 뒤따랐다. 그 무엇도 필요치 않고 오로지 미학만을 추구하던 당신이, 실은 그저 품어줄 온기가 절실하기에 도리어 차가운 인형인 척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단단한 밀랍 인형 속 일리야 미하일로프에게는 누군가의 빛이, 지표가, 작은 손길이 얼마나 절실할까. 이것이 자신의 오만일 수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니 그가 도움을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 그날 밤의 일은 서로만의 비밀로 묻어둔 채 물러나야만 했고, 그러고자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메피스토에서 지난 1년간 더럽혀온 손은 누군가를 이끌어줄 만한 위인의 손은 아니라 여겼으나, 그럼에도 감히 그를 돕고 싶었다.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필요치 않다고 여겨졌다. 저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만큼 그 또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었다. 속죄나, 책무와는 달랐다. 그저,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고 싶었기에. 그렇게 내어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었다.

 

 

볼리드, 로빈 카펜터는 그날 이후 더는 악마의 작품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 일리야 미하일로프에게 빛으로서 온기를 나누어주고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줄 작품이 되어, 이제는 그가 망가트리고 방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나갈 작품으로서 존재하기로 마음먹은 날.

여전히 작품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으나 주체와 목적이 뒤바뀐 이 관계는 기나긴 겨울밤을 녹이는 미풍의 시작점이라고, 로빈 카펜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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